본문 바로가기

재택근무 1년간의 소회

728x90

서른살의 재택근무 1년간의 소회

 

 

 

 

어느덧 코로나 발생 1년, 재택근무도 1년이 되는 달이다.

회사를 잘 만난 탓에 우리회사는 낌새가 보이자마자 재택근무로 전환하였다.

물론 초기엔 일주일 내내 재택을 한게 아니라 주2~3회 회사에 나가는걸로.

 

 

아무튼 난 생애 첫 재택근무에 어린아이마냥 속으로 기뻐했다.

연일 늘어나는 확진자수를 보며 간사한 나는 방역 단계가 내려가지 않았으면 하기도 했다.

 

 

재택근무인 날이면 먹고싶은걸 사와서 풀어놓고 음악도 크게 틀어놓고 업무에 매진했다.

나도 모르게 일의 능률이 올라가는 것 같았다.

아 재택근무가 내 업무스타일에 맞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 시간이 지나갔다.

이젠 재택근무에 익숙해졌다. 8시59분에 일어나 1분안에 옆방에 출근하고 

양치를 하면서 사내 망에 접속한다.

 

 

어머니는 "너 회사 짤렸니?"로 아침안부를 묻곤하셨다.

 

 

그도 그럴것이

머리와 수염은 자르지 않아 조선시대 참수를 당하기 직전의 사람같았는데,

언제 이렇게 길러보냐며 돈아끼고 좋다는 생각에 계속 길러도 보았다.

어디든 힘들겠지만 미용실이나 화장업계 면도업계는 더 타격이 컸으리라.

 

 

배달음식 일 1회는 일상이 되었고, 줌을 통한 화상회의도 일상이 되었다.

그전에는 어떻게 회사에서 9시간을 '뻐긴건지' 상상이 안갔다.

그만큼 쓸데없는 시간도 많았다는걸 의미한다.

 

 

보고를 위한 보고서와 보여주기식 회의.

친목을 다지려는 회의.

관리자 직급이 되면 팀을 규합하려는 성격이 강해진다.

쓸데없이 긴 점심시간, 화장실 시간 바람쐬러 나가는 시간...

 

 

아무튼 두 달, 세 달이 넘어가고, 카페인과 멀어지면서 변화가 생겼다.

내 사회적 능력과 대인관계에 대한 막막함이 생겨났다.

 

 

말을 별로 하지않다보니 썩 괜찮았던 나의 유머와 언변이 빛을 잃게 되었다.

그저 머릿속에 멤돌다 내뱉지 않는 상황이 많았다.

언어에 대한 나태함이 생긴 것이다.

 

 

굳이 더 말할까? 한마디라도 덜 하려는 생각이 커졌다.

배달음식은 그저 '문 앞에 놔달라'는 말은 배달원과 짧지만 인간적인 교류를 하기 귀찮아서이다.

방역이 우선이기도 하지만.

 

 

이와 같이 대인관계도 협소해졌다. 모든 모임이 취소되면서 사회적 동물이였던 나는

일본의 히키코모리처럼 연락을 하지 않은 채로 지내게 되었다.

 

 

이에 따른 기회비용을 줄이는데엔 탁월한 효과를 보았다.

남들도 나처럼 돈을 쓸 곳이 없어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하는거겠지.

 

 

엑티브한 활동이나 사교모임이 제한되자 나같이 내향적인 사람과 달리

외향적인 사람은 정말 힘들겠구나싶었다.

 

 

이러한 격동 속에 새로운 산업, 새로운 시대, 새로운,,새로운,,이 많아졌고

나는 피하고 피하고 피해서 더욱 집안으로 들어갔다.

 

 

어쩌면 코로나 이후 여름과 겨울은 내 인생 가장 따뜻한 겨울과 시원한 여름이 되었다.

 

 

시간은 또 흐르고 흘러 1년이 되가는 지금

업무는 손에 잘 잡히지 않고, 그 외적인 것(사업,다른 일)에 초점이 맞춰졌다.

노동소득은 그저 생계소득일뿐 이라는 생각이 강해졌다.

 

 

착실하게 20년 30년간 00맨이 되어 경기도에 자그마한 아파트를 구매해

내 가족을 꾸려 행복하게 지냈습니다. 라는 8090년대 일상은

 

 

이제 소설이 되었다.

내 인생에서 '대격변'인 상황이 벌어지는 지금

난 더욱 몽상가가 되어 집구석에서 고민만하는 사람이 되가고 있는듯하다.

 

 

2년차의 소회를 쓰지 않길 바랄뿐이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점을 보았다  (0) 2021.02.19
고작 우리에게 통찰력이 필요할까?  (0) 2021.01.08
2021  (0) 2021.01.03
포시즌호텔서울 더마켓키친  (0) 2020.12.30